세상에 많고 그 많은 나라들 중에 하필이면 나는 왜 아일랜드로 갔었을까? 1차적으로 가장 빠르게, 가장 멀리 그리고 나를 알 수 있는 사람이 가능한 적은 곳으로 가고 싶었다. 그게 이유였다. 그래서 이미 알려진 나라들과 준비기간이 오래걸리는 나라들을 제외하고, 남은 곳이 유럽의 작은 섬 아일랜드라는 나라였다. 장교로서 군대 전역과 동시에 비싼 돈을 주고 비행기를 예매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남들과는 다른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라 기억한다. 호주나 미국, 캐나다 등 알려진 곳으로 간다면 너무 뻔한 워킹홀리데이 이야기가 될 것 같고, 내가  특별해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나마 알려지지 않은 숨은 보석같은 곳이었고, 돈만 낸다면 비자는 바로 해결되는 그런 나라였다. 멀고 빨리 갈 수 있는 나라, 그러니 취업이야기고 가족이야기고 안할 수 있는 공간이 내게는 아일랜드였다.  



작고 조용한 나라 아일랜드. 아무도 나를 모를 것이라는 기대감. 내가 어떤 마음인지, 어떤 과거를 가졌는지 아무도 나를 모른다. 취업을 위한 영어 스피킹을 준비하고, 2년 동안 시험을 면접을 준비하며, 전화영어로 실력을 쌓은 탓에 제법 영어를 했다. 그래도 일하면서 합법적으로 체류하기 위해서는 학원에 등록해야 했다. 아일랜드에서 일하면서 여행자금을 더 모아서 세계일주라는 것을 해볼 생각이었다. 혹은 해외취업이라도 해버린다면 해외에서 살 생각까지도 있었다. 아무튼 꽤 희망적이었고 그렇게 순식간에 적응해 버렸다. 그래서인지 보통은 현지 유학원 사람들이 도와줘야 하는 일들을 혼자 해버렸다. 핸드폰을 개통하고, 집을 알아보고, 시내를 돌아다니고 뭐 그런 소소한 것들을 혼자서 해버렸다.  나는 첫 워홀이었지만 서툴지 않았다. 거기다가 또 이상한 자신감 같은 게 있었다. 나는 일반 유학생들과 다를 것이다. 꽤 영어도 하고, 이미 한국의 기업들에서 합격소식을 받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식당이나 청소일 뭐 그런 것들 말고, 현지 대기업이나 적어도 사무직을 구할 것 같은 상상들을 했다. 마치 따지 않은 사과를 마당에 두고 바라보는 느낌이었다.  그런 사과들 중에서도 나는 아일랜드에서 구글에  취업할 줄 알았다. 뭐 그냥 그럴 수 있을 줄 알았다. 결정적으로, 내 자신감의 근원은 1500만원이 넘는 통장 잔고였다. 세상 어디에서 생존해야하던 이 돈이라면, 정말이지 식은 죽이라도 먹듯 문제없어 보였다.


1500만원, 사실 이 돈에도 내가 여행을 떠나게 된 이유처럼 어떤 사연이있었다. 퇴직금 400만 원, 그리고 마지막 달 월급 100만 원, 그리고 친구에게 빌린 돈 400만 원, 그리고 변액연금 보험을 해약하고 받은 돈 700만 원에서 학자금 100만 원을 갚고 남은 돈 1500만 원이다. 보험을 해지한 건 어쩌면 큰 실수 일수도 아닐 수도 있는 선택이었다. 원래 연금보험의 목적이라면 30년 납입을 목적으로 했고, 이건 죽어도 취업을 할 것이고, 30년간 돈을 쉬지 않고 벌겠다는 강한 의지였다. 내가 선택한 취업에 대한 물러날 수 없는 나름의 '배수의 진'이었다. 30만 원씩 2년 넘게 납입을 했고, 내 유일한 저축 수단이자, 강력한  취업에 대한 의지였다. 왜냐하면 단기에 해지를 하면, 원금에 손해가 가는 방식으로 설계된 보험이었고, 나는 충분히 알고 있었고, 그래서 가입했었다.  그렇게 원금 200만 원이나 손해를 보면서도 나는 기여코 나가야 했다.  그렇게 나는 배수진을 건버렷고, 아일랜드에서의 생존이 시작되었다.





취업따위는 버리고 나왔지만, 제법 돈이 있었기에 어깨에 힘이 들어가서인지 아일랜드에 너무 잘 적응해버렸다. 매일 같이 외식을 했고, 돈을 아껴야 한다는 생각과 여행을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간  혹사당한 청춘에 대한 사죄의 의미로 나에게 방종이라는 것을 좀 주고 싶었다. 정말 마음 놓고 놀았다. 유럽의 클럽이 좋았고, 이른  오후부터 특유의 유쾌한 기네스 맥주 향이 팍팍 나는 아이리쉬 펍들이 좋았고, 친절한 더블린 현지인 친구들과 학원에서 만난 인연들과 노는 게 너무 좋았다. 더블린에 있는 모든 클럽은 다 보려 했고, 모든 술은 다 먹고 싶었다. 거기에 더해 유로에 대한 개념도 없었다. 10유로가 그냥 10유로로 다가왔지 1만 5천 원으로 다가오지 않았으니 말이다. 아낀다고 아껴먹고 쉐어룸도 쓰고, 나름대로 가끔씩 논다고 놀았는데 내 기준에 비해서만 상대적이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한국에서의 버릇이었는지 누구른 만나던 계산은 내가 하고 싶었다.  한국에서 처럼 현금을 들고 다니는 게 귀찮았고,  동전을 받는 일들이 귀찮았다. 그런 귀찮음을 자랑처럼 말하고 다녔고, 카드만 쓰고 다녔다. 3개의 카드에 돈을 나눠서 들고 왔고, 돌아가면서 쓰다 보니 얼마를 썼는지 제대로 확인할 길이 없었다. 굳이 공인인증서를 로그인하며, 잔액을 하는 그런 사치에 가까운 수고스러움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충분한 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아일랜드로 입국한지 두 달하고도 보름이 지나서 카드 사용이 멈췄다. 잔액부족. 그때서야 잔고를 확인했다. 3개의 통장 잔액의 합이 900원. 심장이 순간 멈추는  듯했다. '아... 당장 저녁에 뭐 먹지?' 그게 걱정이었다. 



 
 불행중 다행인지 제법 좋은 버릇이 있었다. 돈을 지갑에 넣지 않는 버릇이었는데, 집으로 뛰어가서는 장농에 있는 옷들 전부를 뒤졌다. 동전들이 몇 개 나왔고, 그 돈들로 최후의 만찬을 위한 시장을 봤다. '파스타 면과 소스'만 샀다. 이거면 3일은 버틸 수 있었다. 실컷 놀다 그때서야 집 생각이 났다. '돈을 달라고 전화를 할까?'라는 생각이 미쳐들었지만, 나는 절대로 그럴 수 없었다. '나는 매형의 일로 쓰러지신 아버지를 버리고 도망온 장남이자, 이런저런 법적 경제적 문제들을 해결하느라 바쁜 가족들을 나몰라라하며 도망쳐버린 호로자식' 그게 나였다. 지구 반대편에서의 생존은 오롯히 나의 몫으로 그렇게 다가왔다. 생각만했었던 해외 구직을 나는 당장 했어야 했다. 편한 마음에 직업소개소? 몇 곳을 돌았지만 해외 학위도 없고, 해외 취업 경험도 없는 나에게는 무급인턴 자리가 전부였다. 그게 아니라면 창고 같은 곳에서 일하라고 했다. 유럽의 구글 본사는 나 혼자만의 꿈이었다.  어쩔수 없이 나는 당장에 할 수 있는 일들을 찾다가, 하루 일하고 하루 돈을 받는 캐시 잡을 구했다. 그게 신문팔이였다. 거리에서 신문을 파는 것, 그게 내 위치였다. 한국이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일을 나는 아일랜드에서 하게 된 것이다. 통장 잔액 900원에 나는 바뀌었다. 그렇게 나의 직업은 돈 있는 '백수'에서, 돈 없는 '백수 신문팔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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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나가는 형님

- 취업대신 3년간 세계일주 - 무전으로 5개 대륙 종횡무진 여행기 - 노숙자부터 대통령까지 인터뷰 여행기 - 할리데이비슨부터 히치하이킹까지 - 세상에 도전하는 청년의 여행기를 연재합니다. https://www.facebook.com/park.jaebyoung.Dani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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